2014년 8월 10일 일요일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장주의 집은 가난해서, 그는 감하우에게 곡식을 빌리려고 갔다. 그 제후가 말했다.
좋다. 나는 곧 내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얻게 되는데, 너에게 삼백 금을 빌려주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그러자 장주는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어제 이곳으로 올 때, 길 중간에서 소리치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제가 마차바퀴 자국을 돌아다보니, 거기에는 잉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잉어에게 잉어 아닌가! 너는 무엇하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잉어는 저는 동해의 왕국에서 파도를 담당하는 신하인데, 당신은 한 국자의 물로 나를 살릴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는 저는 잘 말했습니다. ‘좋다. 나는 지금 남쪽으로 오나라와 월나라의 왕에게 유세하러 가는 중이니, 서강의 물길을 네가 있는 곳으로 향하도록 하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그러자 그 잉어는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저는 없으면 살 수 없는 그런 것을 잃었습니다. 제게는 살 수 있는 곳이 지금 없습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나를 살릴 수 있는 한 국자의 물입니다. 만일 그것이 당신이 말할 수 있는 전부라면, 당신은 건어물 진열대에서 저를 찾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장자 <외물(外物)>


철학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그 하나가 세계와 인간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체계를 설정하려고 노력하는 철학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런 보편성과 합리성을 회의하면서 실존적 사태에 주어진 것만을 기술하려는 철학이다. 편의상 전자를 합리적 철학이라 부르고, 후자는 기술적 철학이라 부르자. 물론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주어진 세계와 인간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합리적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합리적 철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도래해야만 할 합리적 체계를 모색하고 이것을 도달해야 할 이념으로 설정하는 실천적인 합리적 철학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말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합리적 철학도 설명적인 합리적 철학과 실천적인 합리적 철학으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장자의 철학은 분명 합리적 철학이라기보다는 기술적 철학에 가깝다. 장자 철학의 이런 성격은 그가 항상 반복적으로 우리의 삶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데 그쳐야 지극한 것이다.’ 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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